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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김득구
2023년 1월 <꼬꼬무> 프로그램에서 불굴의 의지를 가진, 비운의 복서 "김득구"씨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1980년대 한국 복싱을 휘어잡고, 세계 무대로 나간 당찬 선수 김득구의 사망 관련 이야기를 재조명하여 들려주었다.
김득구 선수의 경우 레이 맨시니와의 챔피언 도전 중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4라운드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19초 만에 쓰러져 경기에 패하였다. 이후 정신력으로 다시 일어나 경기를 뛰려고 하였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김득구 프로필
이름- 김득구 (金㝶九)
생년월일- 1955년 1월 8일
고향- 강원도 고성
사망일- 1982년 11월 18일 (26살)
직업- 대한민국 권투선수
가족관계- 아버지, 어머니, 형
데뷔- 서울 동아체육관(관장 김현치) 아래에서 3년간 아마추어 선수 활동을 하였다. 이후 1978년 4라운드 판정승으로 프로 권투선수계에 데뷔하였다.
챔피언 획득- 한국 라이트급 챔피언, 동양 라이트급 챔피언
별명- 동양의 왕
김득구 사망원인
1982년 11월 14일 WBA(세계권투협회) 라이트급 타이틀 시합이 열렸다. 한국의 김득구 선수와 세계챔피언 맨시니가 경기를 펼쳤고, 그 경기에서 맨시니의 주먹에 턱을 맞고 쓰러져 사망하였다. 4일간의 뇌사상태 끝에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산소마스크를 떼어내게 되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위치한 시저스팰리스호텔에 설치된 특설 링에서 한국의 김득구 선수와, 챔피언 미국의 맨시니 선수간의 세계권투협회(WBA) 라이틀 급 경기가 열렸다. 김득구의 경우 당시에 맨시니가 절대적으로 경기에서 유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집고, 대등하게 경기를 펼쳤다.
맨시니의 경우 김득구와 경기를 하기 전에 23승 한 게임 중에 19번을 KO승을 하였고, 이 중 15번은 3라운드 안에 KO승을 따낼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맨시니를 상대로 14라운드 경기를 김득구는 펼쳤다.
1라운드부터 9라운드 까지는 김득구 선수가 빼어난 기량을 선보였으나, 10라운드를 기점으로 맨시니 쪽으로 경기가 기울어졌다. 그렇지만 김득구는 끝까지 넘어지지 않고 일어나 싸웠다. 일반적인 경기였다면, 벌써 끝이 났겠지만 김득구 선수가 정신력으로 버티며 싸웠던 것이다.
1980년대에는 권투선수가 15회로 진행되었는데, 김득구 선수는 14회 시작과 거의 동시에 19초 만에 쓰러졌다. 맨시니의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김득구의 턱을 강타하면서 쓰러진 것이다.
쓰러진 김득구는 레퍼리가 카운트 10을 헤아릴 무렵에 몸을 휘청거리며 일어섰지만, 다시 링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쓰러진 김득구를 근처 병원으로 옮긴 후, 뇌에 고여있는 피를 빼내는 수술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뇌사 판정을 받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뇌사상태에 놓이면, 가족의 동의 여부에 따라서 사망 판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득구 어머니의 동의에 따라 생명 연장 호흡기를 제거하였다. 26살의 나이에 사망한 김득구는 선수는 심장과 신장을 2명의 동양계 미국인에게 기증 한 뒤, 관에 실려 고국으로 돌아왔다.
김득구 선수 사망으로 인한, 세계 권투계의 변화
뉴욕 타임즈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언론사에서는 권투의 잔혹성에 대한 지적과 성찰이 거세게 일었다. 김득구 선수 사망사건 발생할 때까지 총 340여 명의 권투선수가 경기 도중 혹은 경기 이후 사망하거나 식물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15회까지 이어지는 권투의 잔혹성에 대한 지적이 거세게 이르렀고, 그로 인하여 미국 의회에서는 청문회까지 열렸다. 김득구 선수의 사망을 계기로 국제 권투 기구들은 기존 15회 이루어지는 경기를 12회로 줄였다. 매 라운드 사이의 휴식 시간을 60초에서 90초로 늘렸다. 스텐딩다운제를 도입함으로써 선수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들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대책들은 340여 명이나 되는 선수들이 죽고 난 이후에 서서히 만들어진 것이었다.
김득구 사망 여파
김득구가 사망한 이후, 김득구의 모친은 2개월 뒤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또한 김득구의 경기 심판 리처드 그린은, 죄책감으로 인해 7개월 뒤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또한 상대 선수였던 레이 맨시니 또한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하였을 정도였다. 맨시니는 이 김득구 사망사건을 계기로, 24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권투선수를 그만두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 최고 인기를 누리던 권투는, 김득구 선수의 사망 사건으로 인하여 위험한 스포츠라는 인식이 각인되었다. 대한민국에 거세게 불었던 복싱 권투 붐이 점차 사라지는 계기로 작용하였다.